포트폴리오

2019. 11. 12. 23:13나의조경이야기

 하루는 부모님 짐 정리를 돕다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 만들어 준 그림집을 찾게 되었다. 유치원처럼 운영하던 미술학원인데, 국민학교 입학 전 2년 정도 다녔던 것 같다. 마흔여 장의 그림은 뻔했다. 아빠 엄마 얼굴, 바닷속 이야기, 농촌 체험학습 후 등등 딱히 어떤 감정이나 큰 신선함 등은 없었으나 신기한 점은 있었다. 하나 같이 미완성이라는 것. 워낙 어릴 때 극도로 산만했었다고 하니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시간에 완성시키지 못했을 거고, 여전히 남아있는 듯한 어릴 적 성향을 돌이켜보면 그리는 중간에 쉽게 흥미를 잃고 딴생각이나 했었을게 확실하다. 아내와 한참을 보며 웃어 넘기 긴 했지만 그건 슬픈 일이기도 했다.

 오래된 하드디스크에서 또 다른 미완의 것을 들춰 본다. 출력본으로 조차 만들지 못한, 만들다 만 그곳에 미완의 나도 있었다. 고민도 많고 나름 치열했던 흔적들이 어릴 적 그림집 보다 훨씬 저리게 다가왔다. 그때 꿈꾸던 모습과는 다소 다르게 살고 있지만, 그때의 목마름과 지금의 목마름이 똑같진 않겠지만, 질리도록 마무리 못하는 한심한 내가 그래도 지금의 나 정도는 만들어 준 것 같아 고맙기도 했다. 이 포트폴리오는 끝까지 완성되지 못할게 뻔하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은 이 미완의 인생도 마찬가지겠지. 개중에 낯간지럽지만 가장 슬픈 글을 긁어와 본다. 포트폴리오의 프롤로그로 쓴 글이다. 당연히 에필로그는 없다.

 "언제나 늘 그렇듯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 목마른 일이다. 2학년 수업시간, 처음으로 연필을 들고 선긋기를 시작하고 30도 커터를 들고 우드락을 삐뚤 빠뚤 자르던 시간이 떠오른다. 밤을 새워가며 손바닥이 새카매지도록 그리고 지워나간 작업들 자체 보다 그 순간들, 찌든 담배 냄새와 주변 친구들의 소란스러움, 기름진 향기의 싸구려 순살 치킨과 소주 한잔에 대한 갈망,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듯한 김동률 2집에 대한 기억들이 더 애절한 것은 그때마다 느꼈던 지독한 목마름 때문일 테다. 언젠간 이 갈증이 해소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막연한 조바심으로 오히려 난 더욱 숨이 막혀버리곤 했다. 결과는 언제나 창피했고 한 없이 부족했다. 더욱이 그것을 마치 최선이자 최고인 마냥 포장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얼굴이 붉어진다. 포트폴리오 작업을 하며 난 또다시 부끄러운 짓을 하고 만다. 허나 이것이 나의 또 다른 반성의 지표가 되기를. 부끄러움과 갈증이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기를. 검게 찌든 이제는 고장나버린 제도판과 수북하게 쓰레기처럼 쌓여있는 트레싱지를 아직도 차마 버릴 수 없는, 이 아쉬움을 결코 잊지 않길 바라며. 유월 초여름 졸업을 앞두고."

 

'나의조경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경이야기 1.  (1) 2019.11.13
노가다 프로파간다  (0) 2019.11.03
비오는 날  (0) 2019.11.03
조경 초보  (0) 2019.11.02
there's always a little bit of love-hate thing  (0) 2010.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