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이야기 1.

2019. 11. 13. 01:58나의조경이야기

 오랜만에 친구와 술 한잔을 나누었다. 이 녀석은 국민학교 때부터 같은 아파트에 살며 부대끼던 불알친구인데, 몇 년만이든 며칠만이든 언제나 정겹고 편하다. 좋은 곳에서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했고, 여자 친구는 아직 없다는 슬픈 이야기와 더불어 잘 알지도 못하는 AI와 4차 산업, 딥러닝 등등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해주는데 컴퓨터 관련이나 무슨 무슨 C언어, 자바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힘들어하던 나도 재미가 있었다. 특히 딥러닝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언젠가는 우리가 하는 견적이나 간단한 설계 따위의 일들은 모조리 컴퓨터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궁금한 건 많았고 특히 인공지능 개발의 현주소가 어떤 상황인지, 그럼 우린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냐며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 이상 파고들수록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거니와 술에 취해 앞뒤가 뒤죽박죽 대니 거기서 그 주제는 마무리되었다. 이젠 내 차롄가 싶어 나도 내가 하는 일 얘기를 꺼냈다. 술에 절은 공사 차장이 안전화에 맥주를 부어 나눠 마신 이야기부터 모두가 다 듣는 무전기로 대놓고 쌍욕을 먹은 이야기, 꽝꽝 얼은 땅을 뿌레카로 찍어내며 나무를 심던 이야기를 하하 껄껄하다가 나중에 자기 집 지으면 정원 하나 멋지게 만들어달라는 이야기로 결론이 났고, 나는 그냥 고생 많은 노가다가 되었다.

 나는 안다. 내가 만약 용산 공원이나 랜스케잎 어바니즘 등의 조경 이론, WEST8의 디자인, 하그리브스의 설계 철학 따위의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다면 어땠을지. 아니 소쇄원이나 창덕궁 후원 정도는 알지 않았을까. 아니 그냥 가까운 광교 호수공원 이야기는 어땠을까. 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술안주가 될 수는 없었을까. 그 녀석의 딥러닝이나 AI처럼 말이다. 물론 딥러닝은 알파고와 함께 나름 친숙한 것이기도 하고, 유명한 주제이다 보니 단순 비교하긴 어렵겠다. 그렇다면 그나마 비교할만한 (물론 여전히 비교대상이 되긴 어렵지만) 건축은 어떨까. 최근 알쓸신잡에서 유현준 교수의 건축이야기는 많은 이에게 공감도 얻고, 재밌는 이야기로 이슈가 되었다. 특히 처마에 대한 이야기나 삼거리, 사거리 이야기는 친구가 먼저 얘기를 꺼낼 정도로 많이 인상 깊었나 보다. 딱히 쉬운 주제도 아니었지만 그만큼 대중들의 문화 수준이 높아진 까닭도 있겠고,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간 능력의 결과일 수 도 있을 것이다. 특히 러브하우스 수준의 건축에서 유교수의 이야기는 건축에 대한 인식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렸다고 생각한다. 건축에 대한 철학과 인문학적 분석이 이렇게나 재밌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내가 재밌는 주제를 재미없게 표현하는 재미없는 사람이거나, 조경이 재미없는 것이거나. 아니면 둘 다 일 수도 있다. 왜 그럴까. 이유야 많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우리의 삶과 조경 사이의 간극이 너무 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이는 특징 중의 하나가 소득 수준이 높아질수록 화훼 시장의 규모도 커지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화훼 시장은 기록적으로 그 규모가 축소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 수 있다. 전체 시장의 매출도 일 년에 딱 두 번, 졸업 입학 시즌과 가정의 달인 5월로 집중되어있다. 평상시엔 꽃이나 식물을 즐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조경도 마찬가지다. 조경을 나무 키우는 정도의 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 수준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조경 자체가 문제다. 삶에 파고들지도 못하면서 나 좀 봐달라고 징징댄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달라 구걸하는 건 길거리의 도를 아십니까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조경을 하는 우리 모두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뭐가 되었든 나는 조경이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재밌게 하고 싶다. 조경하는 사람들끼리 말고, 내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가족들 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무도 보지는 않지만 이 허접한 내 홈페이지에서. 조경이 많은 사람들의 삶에 파고들기 바란다. 시간이 걸릴 것이고,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시나브로 스며들기 바라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사판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만들 것이다. 20년 전 조경 전공을 선택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앞으로 조경이 비전이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토록 원하던 밝은 전망 근처에도 가보지도 못한 채 미래에 사라질 직업 중 하나가 돼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빡빡한 삶들의 작은 구석 한 켠에라도 조경의 자리가 생기길 바라며, 옥상 한 켠 고무 다라이에 심어놓은 작은 풀잎처럼 나의 조경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만 재밌는 이야기가 아닌 모두가 즐기고 따지고 욕도 하고 고민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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