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조경이야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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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이야기 1.
오랜만에 친구와 술 한잔을 나누었다. 이 녀석은 국민학교 때부터 같은 아파트에 살며 부대끼던 불알친구인데, 몇 년만이든 며칠만이든 언제나 정겹고 편하다. 좋은 곳에서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했고, 여자 친구는 아직 없다는 슬픈 이야기와 더불어 잘 알지도 못하는 AI와 4차 산업, 딥러닝 등등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해주는데 컴퓨터 관련이나 무슨 무슨 C언어, 자바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힘들어하던 나도 재미가 있었다. 특히 딥러닝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언젠가는 우리가 하는 견적이나 간단한 설계 따위의 일들은 모조리 컴퓨터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궁금한 건 많았고 특히 인공지능 개발의 현주소가 어떤 상황인지, 그럼 우린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냐며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 이상 파고..
2019.11.13 -
포트폴리오
하루는 부모님 짐 정리를 돕다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 만들어 준 그림집을 찾게 되었다. 유치원처럼 운영하던 미술학원인데, 국민학교 입학 전 2년 정도 다녔던 것 같다. 마흔여 장의 그림은 뻔했다. 아빠 엄마 얼굴, 바닷속 이야기, 농촌 체험학습 후 등등 딱히 어떤 감정이나 큰 신선함 등은 없었으나 신기한 점은 있었다. 하나 같이 미완성이라는 것. 워낙 어릴 때 극도로 산만했었다고 하니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시간에 완성시키지 못했을 거고, 여전히 남아있는 듯한 어릴 적 성향을 돌이켜보면 그리는 중간에 쉽게 흥미를 잃고 딴생각이나 했었을게 확실하다. 아내와 한참을 보며 웃어 넘기 긴 했지만 그건 슬픈 일이기도 했다. 오래된 하드디스크에서 또 다른 미완의 것을 들춰 본다. 출력본으로 조차 만들지 못한, 만들다 ..
2019.11.12 -
노가다 프로파간다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돈과 돈의 관계. 속고 당하는, 당하고 속이는, 욕하고 욕먹는, 더럽고 치사하고 살벌한 상황들. 설득 보단 윽박이, 협의 보단 지시와 명령이, 설명 보단 욕설이 우선 되는 곳. 이 곳에서 우리는 사람이, 하나의 가정이 살아갈 집을 만들고 그들이 만끽할 공간을 만든다. 사랑, 진심, 평화 따위의 것들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존재하지 않는 이 곳에서 자연을 쉼을 놀이를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만들어 간다. 우리는 설계와 시공과의 괴리 따위를 논하기 보다 자신의 마음과 입과 행동의 괴리를 더욱 반성하고 한탄해야 한다. 그 어떤 하찮은 것이라도 만드는 자에겐 그것을 사용할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양심과 도리는 있어야 한다. 오늘의 반성문. 2011.11.21
2019.11.03 -
비오는 날
비오는 주말 근무. 현장의 산만한 풍경은 강렬한 자극이다. 끊임없이 잘라내고, 부수고, 뚫어대는 굉음 속에서 힘겹게 식재된 앙상한 왕벚나무 가지의 흔들림이 주는 왠지 모를 처절함. 거대한 중장비가 스트로브잣나무를 뭉텅이채 너덧 주씩 무자비하게 들고 나르는 모습은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는다. 뻘이 된 흙 속에서 허우적 대는 육따블 기사의 욕지거리도, 우의도 벗어던진 채 온몸에 흙이 묻은 이반장님의 꽉 낀 빨간 티셔츠도,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덜 깬 김과장님의 몽롱한 눈도, 축축하게 젖어버린 내 안전화의 썩은 냄새도, 녹지 위에 덩그러니 쌓여 있는 공구리 똥도, 수 십번 씩 바뀐 샵도면 뭉치들도 모두 모두 빗소리와 함께 하나 하나 바늘 처럼 내 몸을 찌릿하게 쏘아댄다. 심장이 두근 댄다. 이러다 미치거나 ..
2019.11.03 -
조경 초보
벌써 9년이나 묵은 글이다. 불과 몇 달 전에 쓴 것만 같다. 조경 초보 딱지를 떼지 못한 탓인 듯 씁쓸하다가도 사뭇 그 뜨거움이 아직은 가슴 한켠 남아있는 듯 하여 마음이 놓이기도 하다. 조경밥을 먹은지도 햇수로 13년인데 여전히 조경은 어렵다. 하필 이렇게 추운 날씨에 현장 근무라니, 차라리 왔다 갔다 움직이기라도 하면 그나마 괜찮으련만 꼼짝없이 서서 준공도면을 그리느라 한 없이 매서운 칼바람이 야속하기만 하다. 마른 잎 조차 다 떨어진, 가지만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이리저리 헤매면서 요 녀석들을 하나 둘씩 세어가며 구분해 나가는 일이 여간 쉽지가 않다. 활짝 꽃이 폈거나 잎이 무성할 때 꽃이나 잎, 수형으로 간신히 구분하던 것들인데 그마저도 홀랑 벗어 던져 버렸으니 어쩌란 말인가. 그럼에도 재밌는 ..
2019.11.02 -
there's always a little bit of love-hate thing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가도, 맘대로 한 적은 있는지 되묻는다.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온몸이 가렵다. 어디가 가려운지도 모른 채 긁어대는 건 정말 답답한 일이다. 설계를 그만두고, 아니 그만둔다기 보단 잠시 멈추고 노가다의 세계로 뛰어든다. 혹시 내가 원하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2010.07.09